[선거를 앞두고②] 애국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2024.04.13 07:40 59 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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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반인륜적 애국'의 관성에 대해
독재하수인, 용공조작하고 "애국"외쳐
보수우파로 위장한 뒤 "종북 박멸" 구호
한동훈도 야당을 "종북세력"으로 매도 

"고문이 애국이었다"

고문기술자로 잘 알려진 이근안은 지난 2017년 한 시사주간지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당시 시대 상황에선 고문이 애국이었다.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그가 자기에게 고문받은 후유증으로 돌아간 김근태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박종철을 고문해 죽인 경찰들 역시 유족에게 사과한 적 없다. 사람을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아내고 그 후유증으로 죽게 만들었으면서도 죄의식이 아니라 자부심을 느끼는 심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제주 4.3 때 어린아이와 부녀자들까지 마구잡이로 학살했던 서북청년단원들, 한국전쟁 중 거창 등지에서 양민들을 골짜기로 끌고가 ‘골로 보냈던’ 군인들, 1980년 봄 광주에서 젊은 남녀 학생들을 대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아 죽였던 공수부대원들, 무고한 사람을 고문해서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투옥시키거나 ‘의문사’한 시신으로 발견되게 했던 공안요원들. 이들 중 자기 책임을 인정하고 유족에게 사과한 사람은 다 합쳐도 서너 명밖에 안 된다.

고문 자행을 애국이라 주장했던 이근안. 사진=나무위키

고문 자행을 애국이라 주장했던 이근안. 사진=나무위키

반공이 애국으로 

이승만으로부터 전두환까지 이어지는 37년간의 독재정권 시절에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은 정권 옹위가 ‘애국’이라는 담론을 퍼뜨리는 데에 열중했다. 그들이 독재를 정당화하는 명분은 ‘반공’이었다.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려면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들은 권력 유지를 위해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을 탄압하면서, ‘애국’의 의미를 민주주의와 인권에 반대되는 위치로 이동시켰다. 그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간 기본권을 요구하는 것은 ‘비애국적’이거나 ‘반애국적’인 행위였다. 사실 ‘애국’에 불의와 반(反)인도를 접합시킨 것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동포를 밀고하고 학대하는 행위에 ‘애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방 이후 청산되었어야 마땅한 이 ‘반(反)인륜적 애국’을 지속시킨 것은 분단체제였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에 치러진 1988년 총선의 결과는 ‘여소야대’였다. 다수파가 된 야당들은 서로 연대하여 ‘광주특위’를 만들고 ‘5공비리 청문회’를 열었다. 전두환 정권의 야만성과 부패상이 조금씩 드러났다. 12.12 쿠데타와 5.17 내란의 공동 주역이었던 노태우에게는 위기였다.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나라 밖에 돌파구가 생겼다.

1980년대 말부터 흔들리던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체제가 급속히 붕괴했다. 노태우 정권은 ‘북방정책’으로 구(舊) 공산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는 한편, 자신감을 갖고 남북대화에 임했다. 수십 차례의 남북회담으로 국제 스포츠 경기대회 단일팀 참가, 이산가족 상봉, 남북 예술단 교환 공연 등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단일팀기인 한반도기도 이때 만들었다. 노태우는 1990년 광복절을 전후한 기간을 ‘민족대교류 기간’으로 선포하고 판문점을 개방하겠다고 호언했다.

1991년에는 남북한이 함께 유엔에 가입했으며,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도 채택했다. ‘합의서’는 상호 체제 인정과 존중, 내부 문제 불개입, 비방 중상 금지 등을 규정했다. 1992년에는 한미합동 팀스피리트 훈련도 중단했다.

정부가 공산국가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북한과 교류협력 관계를 진척시키면서 ‘반공이 국시(國是)’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모순이었다. ‘반공’ 이외의 자기 정당화 도구가 필요했다. 노태우 정권은 ‘북방외교’의 성과를 바탕으로 국내 정치구조를 바꾸려 했다. 1990년 초,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을 선언했다. 5.17 내란 세력과 유신세력, 민주화운동 세력 일부가 통합된 것이다. 유신시절부터 민주화운동을 해온 사람들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김영삼이 민주주의를 배신했다고 비난했지만, 군사독재 시절 독재자의 하수인 노릇했던 사람들에게는 ‘기득권 유지’에 청신호가 켜진 일이었다. 전두환 노태우와 한패였던 민정당 정치인들뿐 아니라 안기부, 검찰, 경찰 등 공안당국 관리들도 자기들이 저지른 반(反) 인륜적 행위들을 정당화할 기회를 얻었다.

1990년 1월22일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했다. 언론들은 이를 보수대연합이라 부르며 정당화했다.

1990년 1월22일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했다. 언론들은 이를 보수대연합이라 부르며 정당화했다.

독재가 보수로, 애국으로

‘3당합당’의 조짐이 보일 때부터, 세간에서는 이를 ‘보수대연합’이라고 불렀다. 3당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은 군사독재 세력이 주축이었음에도 민주화운동에서 김영삼이 가졌던 지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보수’를 자칭했다. 그리고 합당에서 배제된 평화민주당과 합당 거부파들이 만든 민주당 등을 ‘진보’라고 불렀다. 사실 김대중은 스스로 ‘진보주의자’라고 한 적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 독재정권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언론들은 ‘보수우파’와 ‘진보좌파’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로써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던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 구도가 ‘보수우파’ 대 ‘진보좌파’의 대립구도로 바뀌었다. 더구나 이 대립구도는 고질적인 지역 분할 구도와 굳게 결합했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각각 TK, PK, 충청의 정치적 대표 격이었으니, 세 지역이 김대중의 지역 기반인 호남을 포위하는 형국이 만들어졌다. 고립된 호남 정치인 김대중은 부득이 ‘진보주의자들’과 연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전라도 빨갱이’라는 말이 생겼다. 호남 출신 보수 정치인과 진보주의자들의 연대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호남=빨갱이’라는 말로 통용된 것이다.

세계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는 그 안티테제인 ‘반공’의 존재 이유도 붕괴시켰다. 북한은 헌법에서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삭제했고, 남한에서도 ‘용공좌경’이라는 말의 효용성이 줄어들었다. 대신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대학가에 불어닥쳤던 ‘북한 바로알기 운동’과 ‘주체사상 학습’이 ‘보수우파’의 새로운 적(敵)으로 떠올랐다. 그들에게 붙은 이름은 처음 ‘친북(親北)’이었으나 1990년대 말에 ‘종북(從北)’으로 바뀌었다. 역대 독재정권이 자기 안위를 위해 ‘용공좌경분자’의 범위를 계속 확장시켰듯이, 이른바 ‘보수우파’도 ‘종북세력’의 범위를 계속 확장시켰다.

그로부터 30년, 이제 ‘통일’을 입에 올리는 사람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우리 사회에 ‘종북주의자’가 남아 있다고 해도 그 수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믿는 사람의 수 정도도 안 될 것이다. 그 시절 종북주의자들 거의 전부가 소리 소문 없이 전향했다.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이 된 사람도 있고, 관변 단체 임원이 된 사람도 있다. ‘용공 좌경분자를 잡아다 고문하는 것이 애국’이라거나 ‘종북세력을 박멸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폭력적이고 반인륜적인 애국담론에서 벗어나 ‘사랑 애(愛)’ 자에 어울리는 애국담론을 만들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진보당을 종북 세력이라며 연일 이념 공세를 펴고 있는 한동훈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 사진=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진보당을 종북 세력이라며 연일 이념 공세를 펴고 있는 한동훈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 사진=연합뉴스

공안검사의 집단망상이 애국으로? 

그런데도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입만 열면 ‘종북’이라는 단어를 꺼낸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을 ‘종북세력의 숙주’라고까지 비난한다. 야당 전체를 박멸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야당 박멸의 의지가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화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활동가들을 ‘공산전체주의자’라고 통칭했고. 야당 대표를 단 한 차례도 만나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 잡아다 고문해서 ‘공산주의자’로 만들 수 있던 때를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 많다. 이근안의 동료 중에도 여전히 ‘고문이 애국’이었다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자칭 ‘애국보수’들의 대중집회 현장에서는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말이 스피커를 타고 울려퍼진다.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을 법으로 처리하는 일은 검찰이 맡았다.

2018년 3월 검찰총장 문무일이 검찰을 대표해 병석에 누운 박종철 아버지에게 사과했지만, 정작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조작에 가담했던 검사는 사과하지 않았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이나 ‘탈북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등 숱한 조작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검사 어느 누구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역시 자기 행위의 동기는 애국심이었다고 믿을 것이다. 한동훈 씨도  ‘억울한 피의자를 기소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독재정권 시절 공안검사들의 집단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에게서 ‘무능한 검사는 범죄자가 잡히기를 기다리고, 평범한 검사는 범죄자를 잡으러다니며, 유능한 검사는 범죄자를 만들어낸다’는 말이 유행했던 시절의 검사상이 다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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