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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릴레오 북's 시즌5 4회 한국 언론, 소멸해야 한다? 이미 소멸됐다 [저널리즘 선언] | 정준희 언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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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저널리즘이 살아남는 법, ‘혁명이냐, 개혁이냐?’

저자들은 ‘개혁 노선’을 따른다면 저널리즘의 제도적 근본인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더 선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트럼프처럼 형식적인 민주주의 절차로 선출된 지도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민주주의에 위배된 행동을 한다면 그의 반자유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행태를 즉각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널리즘은 자유주의적·민주적 통치를 가장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이 노선을 따른다면 저널리즘이 우선시할 엘리트는 더 이상 반자유주의적 성향의 엘리트, 자신의 이익과 집단만을 대변하는 지식인, 고위직 엘리트가 아닌 역사적으로 권리를 박탈당해온 집단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이들일 테고, 따라서 뉴스가 전하는 목소리는 확장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개혁 노선은 ‘사회정의’를 필수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저널리즘을 추구한다. “사회정의를 수용하는 저널리즘은 역사적으로 스스로 변화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 조건을 변화시키는 정보의 공유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저널리즘이다.”(138쪽) 또한 불의와 불평등의 발생을 단순히 목격하는 데 그치기보다는 그 상황을 수정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렇게 개혁 노선의 저널리즘은 자신을 만들어낸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정치 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이를 개선하는 데 힘을 쓴다.

‘혁명 노선’은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해방적인 정치 해결책을 다채롭게 모색하는 길이다. 부의 집중, 빈곤 문제, 생태 문제, 소수자 문제 등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대안들이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저자들은 자유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저널리즘적 상상력을 제한해 저널리즘을 협소한 위치에 머무르게 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 그 너머를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혁명의 길은 엘리트가 전혀 없는 저널리즘, 이상적 규범을 거스르고 현장에서의 쓸모를 최우선으로 하는 저널리즘, 모두를 위한, 하지만 특히 오랫동안 주변부에서 뉴스를 읽고 보고 들어온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저널리즘을 지향한다. 역사 속에서 소수의 내러티브로 치부되어온 다수의 목소리, 관점, 경험을 저널리즘이 빛나게 해주는 길이다. 그렇게 되면 언론인 자신들에게 덧씌워져 있는 자기 검열, 관행, 규범 등을 벗어던질 수 있고, 인종차별, 동성애혐오, 성차별, 여성혐오, 계급주의를 포함한 각종 억압과 차별에 대한 투쟁으로 활력을 얻는 직업적 지형을 구축할 수 있다. “만약 혁명적인 교훈을 얻었다면, 저널리즘은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모든 정치 엘리트에 반대하고, 또 저널리즘이 배제해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철저히 숙고하면서 여성, 유색인종, 소수민족, LGBTQIA 등 소외되고 억압받아온 사회집단을 포용해야 한다고 결론지을 것이다.”(55쪽) “이러한 다양한 실천이 작동 조건으로 통합된다면 저널리즘 제도는 자유민주주의의 사고방식이 선도해온 것보다 더 완전한 레퍼토리를 만들어갈 수 있다.”(143쪽)

이 두 가지 길은 한국 언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언론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존폐의 기로에 서 있는 한국 언론계는 이 두 노선 중 어느 하나를 택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것인가? 언론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지금, 한국 언론에는 혁명적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저널리즘과 사회 사이의 접점: 엘리트, 규범, 수용자

“저널리즘은 또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해야 달라질 수 있을지 재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물론 이 재고는 언론인들이 상황을 직시해야만 시작될 수 있다.”(155쪽)

영미권을 대표하는 언론학자인 세 저자가 지적하는 저널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언론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저널리즘이 사회와 조응하지 못하고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저널리즘이 외부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세 가지 접점, 즉 엘리트, 규범, 수용자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세 접점을 오독하고 방치한 나머지 저널리즘이 위기에 빠졌다는 진단이다. “너무 늦기 전에,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저널리즘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 전에 저널리즘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더 생산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저널리즘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다시 상상해야 할 때다.”(46쪽)

저자들은 저널리즘의 신뢰가 하락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엘리트’ 시스템에 있다고 말한다. 지금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저널리즘은 주류 엘리트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엘리트가 된 기자가 엘리트로부터 얻은 정보를 엘리트 수용자에게 전달할 뿐이다. 하지만 이 정보원 역할을 하고 있는 엘리트 시스템은 이미 대중의 신뢰를 잃은 상태다. 엘리트 시스템은 오작동하고 있고, 엘리트 시스템에 의해 지탱되고 있던 대의민주주의도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도 저널리즘은 이 엘리트 시스템을 벗어나려 하지 않고 계속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서 배제된 것은 무엇인지 저널리즘은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엘리트 시스템에 대한 의존은 여성, 유색인종, 소수민족, 성소수자 등 억압받아온 이들의 삶을 배제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저자들은 저널리즘 관행에서 엘리트들을 떼어내 사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저널리즘 하향세의 상당 부분은 엘리트는 누구인지, 그들은 누구를 배제하는지,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들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등 엘리트에 대한 이해가 타성에 젖은 데에서 비롯한다.”(55쪽) “언론인은 엘리트 시스템의 어느 부분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 대중의 대다수가 엘리트 시스템의 민주주의를 불신하는 상황에서 언론인들은 그 시스템의 민주적 잠재력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을까?”(57쪽)

정확성, 공정성, 독립성, 객관성 등 저널리즘이 신봉해온 ‘규범’은 또 어떤가? 안타깝게도 규범은 현장에서의 취재 행위와 따로 놀기 일쑤여서 유의미한 지침이 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이 한 예다. 기자는 “일을 최우선시”해야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규범은 언론노동에 대한 일종의 남성주의적 접근법이어서 사회적 지위가 약화된 여성의 입을 막고 소외시켰다. ‘차별’에 대한 규범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뉴스룸에는 인종주의, 성차별, 여성혐오, 계급 편견, 외국인혐오, 동성애혐오 등이 난무하고, 이것이 기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시대에 뒤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의 취재 행위와 따로 놀기 일쑤인 규범에 집착하는 바람에 오늘날 언론인들은 “역사책이나 기념 회고록”에 어울리는 존재가 됐다는 게 저자들의 설명이다. “규범에 대한 집착은 언론인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모적이고 불완전하고 엘리트적이며 시대착오적인 열망에 사로잡힘으로써 언론인들은 자신이 얼마나 규범적으로 수정되어야만 하는 존재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들의 규범성은 현장의 조건으로부터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101쪽)

마지막으로 이들이 처리한 정보의 최종적 도달지로서의 ‘수용자’는 이미 저널리즘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기성 저널리즘은 독자가 그냥 당연히 따라붙는 존재인 것으로 ‘가정’했다. 엘리트로부터 얻은 정보를, 엘리트인 자신들이 선별하여 제시하면, 대중 독자들이 그걸 그대로 수용할 거라고 전제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그건 단지 내용물의 생산과 전달을 담당하는 매체가 소수에 의해 과점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딱히 별다른 대안을 갖고 있지 못했던 수용자들이 그런 매체를 우회할 통로와 더 흥미로운 즐길 거리를 갖게 되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떠났다. “한때 기자들이 제멋대로 판단하고 당연시했던 수용자. 그들은 이제 알려진 존재이자 불확실한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이제 더는 언론사의 막대한 이익을 보장하는 기반이 아니다. 사회적 상상 속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도 않고 정치극의 주연도 아니다. 대중은 저널리즘에 반기를 들고 있다.”(128쪽)

저자들은 이 세 가지 접점을 다시 살피고 재규정해야 저널리즘이 사회와 다시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개혁 노선을 따르려면 사회정의의 증진을 위해 세 접점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혁명 노선을 따르려면 모든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 세 접점을 급진적 변화를 위해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언론인들이 모두를 위해, 특히 소외된 공동체를 위해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동참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추천평

유럽을 배회하던 유령이 이제는 세계를 떠돈다. 두 세기 전에는 공산주의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면 지금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저널리즘의 혼돈이라는 낫을 손에 쥐었다. 저명한 언론학자들이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물으며 선언문을 썼다. 번역자들이 세심히 매만진 우리말 속에서도 절박함과 비장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사회로부터 탈구되어버린 저널리즘의 이 관절을 어찌 되맞출 것인가? 선언은 그 자체로 개혁이나 혁명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이 선언은 저널리즘이라는 문화적 제도의 장구한 변화를 여는, 구시대의 조종(弔鐘)을 울린다. 귀 있는 자 듣고, 눈 있는 자 볼지어다.
- 정준희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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